사법고시를 패스한 지인의 교재를 한번 빌려 본 적이 있습니다. 형광펜 한 줄 없이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는데, 당시에는 "이 사람이 공부를 제대로 한 건가" 싶어 의아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부분만 골라서 읽고, 덮고 나서는 혼자 처음부터 논리를 재구성해보는 방식을 썼다고 했습니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평생 고수했던 방식과 거의 똑같았습니다. 형광펜을 안 쳤다는 게 대충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었던 겁니다.

진짜 이해 — 익숙함과 이해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공학 관련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전자기파의 횡파(transverse wave) 특성을 설명하시는데, 솔직히 그때도 느꼈습니다. 이분도 사실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하시는 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횡파란 파동의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진동하는 파동을 말하는데, 당시 수업에서는 그 개념을 공식으로만 외우게 했지, 왜 전자기파가 횡파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주는 교수님은 거의 없었습니다.
공식을 외워서 시험을 쳤습니다. 그리고 딱 시험 끝나는 순간, 전부 사라졌습니다. 새하얗게. 이게 기억력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법 자체가 잘못된 거였습니다.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에서 말하는 '친숙함 착각(familiarity illus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여러 번 읽어서 눈에 익숙해진 상태를 뇌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현상입니다. 형광펜을 그으면 그 구절이 시각적으로 강조되고, 뇌는 그걸 중요하게 등록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막상 덮고 나서 설명하려 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간극이 바로 친숙함과 진짜 이해 사이의 거리입니다.
파인만이 남긴 말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한 마디가 모든 걸 정리합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아니라, 덮고 난 뒤에 얼마나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가 진짜 척도입니다. 출처: Science Direct — 학습과 메타인지 관련 연구에서도 단순 반복 독서보다 자기 설명(self-explanation) 방식이 기억 보존율을 유의미하게 높인다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백지 조립 — 텅 빈 종이 앞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못 합니다
공학 수업에 새로 오신 교수님 한 분이 첫 수업에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2년 넘게 전공을 배운 학생들인데, 정작 개념의 흐름을 스스로 설명하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그분은 수업 절반을 우리가 배웠어야 할 내용을 다시 가르치는 데 썼습니다. 땡땡이치던 애들도 그 시간만 되면 강의실이 꽉 찼습니다. 왜냐면 그 교수님은 공식이 아니라 원리를 설명했거든요.
파인만이 프린스턴 박사 과정에서 쓴 방식이 바로 이 원리 조립입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고 나면 바로 덮었습니다. 형광펜도, 밑줄도, 여백 메모도 없이 그냥 덮습니다. 그 뒤 텅 빈 백지를 꺼내서 기억에만 의존해 방금 읽은 내용의 논리를 처음부터 써 내려갔습니다. 당연히 막힙니다. 막히는 지점이 정확히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 방법을 메타인지(metacognition)적 자기 진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형광펜을 칠하는 행위는 메타인지를 전혀 자극하지 않습니다. 반면 백지 위에 논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즉각적으로 "내가 어디서 막혔는가"를 드러냅니다. 막힌 지점만 다시 찾아 읽고, 또 덮고, 또 조립합니다.
파인만의 룸메이트는 형광펜으로 빼곡하게 칠해진 교재를 들고 다녔습니다. 파인만의 교재는 거의 새 책이었습니다. 시험 결과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형광펜을 얼마나 많이 칠했는지는 이해의 깊이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경험상 이건 거의 확실합니다. 형광펜은 나중에 복습할 때 눈에 띄게 하는 도구로는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광펜을 치는 행위 자체가 이해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 책을 몇 페이지 읽은 뒤 바로 덮는다
- 백지에 기억만으로 논리를 재구성해본다
- 막힌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부분만 다시 찾아 읽는다
- 참고 없이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무지 노트 — 모르는 것을 목록으로 만들면 공부가 날카로워집니다
당시 대학에서는 "대학에서 배운 건 취직하면 하나도 못 써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그게 그냥 자조적인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도 취직하고 나서 회사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왜 그랬을까 돌아보면, 대학에서는 진도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하는 데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인만이 1960년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늘 들고 다닌 노트의 제목은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걸 자랑하는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ignorance)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노트였습니다. 몇 달씩 풀리지 않는 항목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고, 해결되면 줄을 그어 지웠습니다. 이 무지 노트가 그의 독서 커리큘럼이었습니다. 양자역학 교재를 1페이지부터 순서대로 읽는 게 아니라, 노트에 "교환 관계(commutation relation)를 아직 모르겠다"고 적혀 있으면 그 내용이 있는 챕터만 찾아가서 읽는 식이었습니다.
교환 관계란 양자역학에서 두 물리량을 측정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성질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개념입니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의 수학적 토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개념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교재 300페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입니다.
이렇게 모르는 것 중심으로 읽으면 이미 아는 내용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교재 한 권을 겨우 다 뗐을 때, 파인만은 자신의 무지 목록 항목 열두 개를 일곱 권의 책을 뒤져가며 지워버린 상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건 지능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엇을 공략할지 알고 있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 교육심리학 저널에서도 목표 지향적 학습(goal-directed learning)이 비구조적 학습 대비 장기 기억 전환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반복적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인만은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에서 홀로 칠판 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소리 내어 강의했습니다. 이를 설명 기반 학습(elaborative interrogation)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보는 방식입니다. 설명하다가 막히는 지점이 바로 자신의 무지가 뚫린 곳입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챌린저(Challenger)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 조사에서 항공우주공학 경험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경력의 엔지니어들이 놓친 O링(O-ring) 결함을 단 며칠 만에 찾아냈습니다. O링이란 로켓 연료 탱크 이음새를 밀폐하는 고무 부품으로, 저온에서 탄성을 잃어 가스가 누출된 것이 폭발의 직접 원인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인만 독서법은 처음 배우는 사람도 할 수 있나요?
A. 선행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조금 어렵습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려면 최소한의 개요는 먼저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목차를 훑어 전체 구조를 파악한 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항목 하나를 골라 집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게 현실적입니다. 완벽한 방법은 없고, 상황에 맞게 조율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Q. 형광펜 칠하는 게 정말 아무 소용이 없나요?
A. 형광펜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제 경험상 형광펜은 이해 도구가 아니라 복습 탐색 도구로는 유용합니다. 문제는 형광펜을 치는 행위가 이해를 대체한다고 착각할 때입니다. 형광펜을 치고 나서 책을 덮고 스스로 그 내용을 재구성해보는 단계가 뒤따른다면, 형광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도구가 됩니다.
Q. 백지 조립 방식으로 공부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나요?
A.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느립니다. 파인만의 룸메이트가 30페이지 읽을 때 파인만은 10페이지밖에 못 넘겼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시험 직전에 처음부터 다시 복습하는 시간이 거의 필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총 시간으로는 오히려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 직접 비교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Q. 무지 노트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A.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공부 중인 주제에서 누군가 물어봤을 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 같은 항목 세 개만 적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게 출발점이 됩니다. 중요한 건 "내가 배운 것" 목록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것" 목록을 만드는 습관입니다.
결론
사법고시를 통과한 지인의 깨끗한 교재를 떠올릴 때마다, 저는 그게 게으름이 아니라 전략이었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그분이 파인만의 전기를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같은 원리에 도달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아는 것과 익숙한 것을 스스로 구분할 줄 알았던 겁니다.
이 공부법을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부 방식은 상황과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핵심만큼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건 아직 모르는 겁니다. 그 기준 하나만 붙잡고, 책을 덮고 나서 스스로 재구성해보는 습관을 들이면,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운 공부가 가능해질 겁니다. 저도 아직 그 방향으로 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