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쁜 사람은 제가 힘들 때 등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될 때 슬쩍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었습니다. 운동 모임에서 가깝게 지냈던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도 저 자신을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칭찬 뒤에 숨어 있었다
운동 모임에서 A와 B는 처음엔 정말 가까워 보였습니다. A가 먼저 다가가 매일 간식을 챙기고, 집까지 직접 찾아갈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덕분에 B도 마음을 열었고,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절친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시기를 돌이켜보면, B는 A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그 시절에도 저한테 A의 험담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A의 가정사며 과거 이야기를 줄줄이 꺼냈고, 말을 들을수록 A는 문제가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A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자리를 잡아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구조입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의 현실 인식을 서서히 왜곡시켜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 조작을 뜻합니다.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걱정하는 척, 친근한 척하며 은근하게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방식이라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 나를 은근히 깎아내리는 발언을 들을 때 뇌 속의 서열 판단 회로가 즉각 활성화됩니다. 여기서 서열 판단 회로란 사회적 위협을 감지하고 내 위치를 방어하려는 무의식적 반응 시스템을 말합니다. 이때 별 반응 없이 웃고 넘기면 뇌는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판단해 코르티솔(Cortisol), 즉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고 무의식적인 자괴감을 쌓아 올립니다(출처: NIH, Social Evaluative Threat and Cortisol).
저는 지금도 A와 인사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A는 저한테 이상한 행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B의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인지 묘하게 경계하게 되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B의 험담이 제 인식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 칭찬하면서 "그런데 운이 좋았네"라고 슬쩍 덧붙이는 패턴
- 친한 사람 험담을 제3자에게 자연스럽게 흘리는 행동
- 기쁜 소식에 부정적 사례를 꺼내 불안을 주입하는 말버릇
손절 기준, 생각보다 선명했다
A와 B의 관계가 틀어진 결정적인 지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A가 B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남에 반복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B는 그때마다 불쾌감을 표현했지만 A는 그게 왜 문제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B가 먼저 손절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손절당한 B는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왜 손절당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상대가 싫다고 표현한 행동을 계속 반복해 놓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이 가능한가 싶었습니다.
17세기 스페인의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án)은 인간관계에서 독을 품은 자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타인의 악이나 위선을 발견했을 때 미련 없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내면의 평온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때 핵심은 화를 내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임상심리학에서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지원의 성벽 기법(Broken Record Technique)'을 권장합니다. 지원의 성벽 기법이란 감정적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지금은 도울 수 없습니다"처럼 건조한 문장을 반복하는 행동 전략입니다. 쉽게 말해 고장 난 레코드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해서 상대가 감정적 고리를 찾지 못하게 차단하는 방법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Assertiveness).
제 경험상 이건 실제로 꽤 효과적입니다. 억울해하며 해명하거나, 상대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를 품은 채 참는 것보다, 그냥 담담하게 거리를 두는 쪽이 감정 소모가 훨씬 적습니다. 관계를 정리하는 기준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내 기분 나쁘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손절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경계선은 차갑게 긋는 게 아니었다
B는 A와 관계가 틀어진 뒤에도 저한테 그 이야기를 꽤 오래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A에게 굉장히 잘 해줬는데 억울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듣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잘 해준 사람이라면, 가장 친하게 지내던 시절에 그 사람 험담을 저한테 그렇게 많이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자기애적 성향(Narcissistic Tendency)입니다. 자기애적 성향이란 자신을 우월하게 포장하면서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이용해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심리 패턴을 가리킵니다. 발달심리학 연구에서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상대가 잘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상대의 의욕을 꺾으려 한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경계선을 긋는 것은 차갑게 굴거나 관계를 단번에 끊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감정적인 여지를 조금씩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상대가 불필요한 험담을 꺼낼 때 "글쎄요, 제가 깊이 알지 못해서 뭐라 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하고 화제를 바꾸면 충분합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전염 효과(Social Contagion Effect) 차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염 효과란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과장되고 왜곡되어 퍼져나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고리에 제가 반응을 보여줄수록 프레임은 더 강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반대로 제가 건조하게 반응하면 그 프레임은 저를 통해 더 이상 확산되지 않습니다.
경계선은 상대를 밀어내는 담이 아니라, 저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라는 걸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가스라이팅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나요?
A. 칭찬 뒤에 "그런데", "근데 사실"이 반복적으로 붙는다면 한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내가 잘 됐을 때 걱정을 빙자해 부정적 사례를 꺼내는 패턴은 진짜 걱정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욕구에 따라 말하기 때문에, 반복된다면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손절해도 괜찮은 건가요?
A. 오래됐다는 이유가 나쁜 관계를 유지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지인의 불쾌 신호를 여러 번 무시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면, 그건 기간과 상관없이 경계선이 필요한 관계입니다. 단번에 끊기보다는 접점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방식이 감정 소모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입니다.
Q. 경계선을 그으면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A. 처음엔 그런 걱정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갑게 보이는 작은 대가는 이용당하고 무시당하는 큰 손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감정적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람일수록 상대가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됩니다.
Q. 내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요?
A. 직접 따지거나 해명하려 들면 오히려 상대에게 감정적 반응을 보여주는 꼴이 됩니다. 사회심리학의 전염 효과 이론에 따르면, 부정적 프레임은 반응이 없을 때 확산이 멈춥니다. 해당 사람과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조정하고, 제3자에게 해명하기보다는 평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결론
A와 B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B는 아직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A는 왜 손절당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제가 옆에서 보기에,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선을 넘었습니다. 다만 그걸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유독한 인연을 정리하는 일은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하는 게 아닙니다. 제 삶의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가스라이팅 패턴을 알아채고, 손절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감정 없이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제가 이 경험에서 건진 가장 실질적인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