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뉴스를 볼 때마다 솔직히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가자지구, 헤즈볼라, 이란 공습… 사건들은 쏟아지는데 왜 이 갈등이 시작됐는지 맥락이 없으니 그냥 스쳐 지나갔거든요. 그래서 2천 년 유대인 역사부터 직접 파고들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박해의 원인부터 시온주의 탄생, 그리고 현재 중동 분쟁까지가 하나의 긴 실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역사

박해 원인 — 미움은 어디서 왔는가

제가 처음 유대인 역사를 들여다봤을 때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2천 년 가까이 나라도 없이 떠돌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은 민족이, 어째서 그토록 집요하게 미움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자리 잡는 구조를 들여다보니 패턴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집단 전체를 적대시하는 편견과 차별 체계를 가리킵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자 사람들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공포가 극에 달할 때 사회는 언제나 가장 눈에 띄는 이방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걸, 이 장면에서 새삼 실감했습니다.

경제적 역할도 박해를 키웠는데, 그 구조가 흥미로웠습니다. 중세 기독교 사회는 이자를 받는 행위를 죄로 규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지 소유도, 군 복무도, 관직도 막혀 있었기 때문에 대부업이라는 좁은 틈새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결과 일부가 경제적으로 성공하자, 이번엔 "유대인이 돈을 지배한다"는 음모론이 퍼졌습니다. 배제가 만들어낸 결과를 다시 배제의 근거로 쓴 셈입니다.

이 편견은 근대로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독일의 정치 선동가들은 전쟁의 패배와 경제 붕괴의 책임을 통째로 유대인에게 돌렸습니다. 사회 불안이 클수록 희생양을 향한 분노도 커진다는 구조,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패턴입니다. 결국 이 흐름이 20세기 홀로코스트(Holocaust)로 이어졌습니다. 홀로코스트란 나치 독일이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체계적인 집단 살해로 기록됩니다.

  • 종교적 낙인 → 흑사병 등 사회 재난 시 희생양으로 지목
  • 사회적 배제 → 대부업 진입 → 성공 후 역으로 음모론의 표적
  • 근대 정치 선동 → 전쟁 패배·경제 위기의 책임 전가 → 홀로코스트
요약: 반유대주의는 종교적 편견, 경제적 배제가 만든 구조, 그리고 정치적 선동이 겹쳐 쌓인 결과이며 홀로코스트로 절정에 달했다.

 

시온주의 — 국가를 만들겠다는 절박함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1894년 프랑스 파리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대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누명을 쓰고 재판장에 섰습니다.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헝가리 출신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충격을 받았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유럽 어디에도 유대인의 자리는 없다.

헤르츨이 이 인식을 토대로 1897년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 시온주의(Zionism)란 유대 민족이 역사적 고향인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치 운동을 의미합니다. 바젤 강령을 통해 이 목표는 국제 정치의 의제로 올라왔습니다(출처: Britannica, Zionism).

그런데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불편하게 읽혔던 부분은 1917년 벨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었습니다. 벨포어 선언이란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포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 건설을 지지한다고 발표한 외교 문서입니다. 문제는 그 땅이 영국 땅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스만 제국 영토였고, 이미 수십만 명의 아랍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사자 동의 없이 타인의 땅을 약속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영국은 같은 시기에 아랍인들에게도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한 집을 두 사람에게 동시에 판 격이었고, 그 '뒤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국제적 지지는 크게 늘었습니다. 1947년 유엔 분할안(UN Resolution 181)이 제시됐고, 유대인 측은 이를 수용했지만 아랍 측은 거부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직후 주변 아랍 국가 연합군이 침공했고,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 승리의 이면에서 팔레스타인 주민 최대 90만 명이 고향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크바(Nakba), 즉 '대재앙'이라고 부릅니다.

요약: 시온주의는 유럽 반유대주의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했지만, 그 실현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중동 분쟁 — 평화는 왜 자꾸 실패하는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역사를 쭉 따라오다 보면 1993년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이 등장하거든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백악관 잔디밭에서 악수를 나눴습니다. 오슬로 협정이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상호 인정을 전제로 두 국가 공존을 지향한 역사적 평화 협약입니다. 두 사람은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고, 세계는 중동에 봄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봄은 2년도 못 갔습니다. 1995년 라빈 총리가 텔아비브 집회에서 총에 맞아 숨졌는데, 범인이 아랍인이 아닌 같은 유대인 극우 청년이었습니다. 같은 민족이 평화의 싹을 잘라낸 장면이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우파가 권력을 잡았고, 서안 지구의 정착촌(Settlements)은 계속 팽창했습니다. 정착촌이란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 자국 민간인을 이주시켜 세운 거주지로,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지배적 견해입니다(출처: UN ISPAL, 정착촌 관련 문서).

제 경험상 이런 구조를 보면 늘 권력자의 이해관계가 먼저 보입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부패 혐의로 재판 중인데, 전쟁이 길어질수록 재판 일정이 밀립니다. 평화보다 전쟁이 정치 생명 연장에 유리한 구조입니다. 강경 카드가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과 그 후 이어진 가자 지구 폭격, 2026년 이스라엘·미국의 이란 직접 공습까지. 이 모든 사건의 밑바닥에는 해결되지 않은 1948년의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젊은 유대인(밀레니얼·Z세대) 중 약 35%가 스스로를 무교라고 답하고, 미국 유대인 62%가 이스라엘 정부의 행동을 지지하기 어렵다고 응답했습니다. 같은 민족 안에서도 균열이 깊어지고 있는 겁니다.

요약: 오슬로 협정 이후의 평화는 내부 극우 세력과 권력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반복적으로 무너졌고,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반유대주의는 왜 그렇게 오래 지속됐나요?

A. 제가 공부하면서 느낀 건, 반유대주의는 단순한 종교적 혐오가 아니라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편리한 희생양'을 찾는 구조적 메커니즘이었다는 점입니다. 흑사병, 전쟁 패배, 경제 위기 때마다 유대인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위기가 반복되는 한 희생양을 향한 분노도 반복됐고, 그 구조가 2천 년 가까이 이어진 셈입니다.

 

Q.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인가요?

A. 시온주의 자체보다는 그 실현 과정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유럽 박해를 피하려는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이미 수십만 명이 살고 있던 땅에서 원주민을 내몬 나크바로 이어졌습니다. 한쪽의 생존이 다른 쪽의 삶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두 비극이 동시에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시각입니다.

 

Q. 오슬로 협정은 왜 실패했나요?

A. 협정 자체보다 협정 이후 정치 지형이 문제였습니다. 라빈 총리 암살 이후 이스라엘 우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정착촌 확장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협정의 정신은 남아 있었지만 실행 의지가 사라진 셈입니다. 양측 내부의 강경파가 평화 프로세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결과라고 봅니다.

 

Q. 미국 유대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의 갈등은 왜 생긴 건가요?

A. 디아스포라(Diaspora), 즉 고국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 공동체는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해왔습니다. 그런데 가자 지구 폭격 이후 미국 젊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우리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자신의 민족 정체성과 보편적 인권 가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세대의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유대인 2천 년 역사를 쭉 따라오면서 제가 가장 무겁게 남은 장면은 오슬로 협정의 악수가 아니라, 그 악수를 깨뜨린 건 적이 아니라 내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박해의 원인도, 시온주의의 실현도, 중동 분쟁의 지속도 결국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구조가 더 결정적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랜 고난을 버텨온 민족이 지금 또 다른 비극의 한가운데 있는 모습은, 힘만으로는 평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강한 나라가 되는 것과 지혜로운 나라가 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역사에서 읽히는 가장 솔직한 교훈입니다.

참고: https://youtu.be/9IOKtVlK26U?si=mkXNJbMOf_9A8m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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