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캐나다 홈스테이를 하기 전까지 이런 설거지 방식이 존재한다는 걸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세제 거품이 잔뜩 묻은 접시를 그냥 건조대에 올려두는 걸 처음 봤을 때, 제가 뭔가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영국식 설거지라 불리는 이 방식, 이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뒤에는 100년 넘게 쌓인 경제적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개짜리 수도꼭지가 만든 100년의 관습
제가 캐나다 홈스테이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을 때의 일입니다. 5인 가족이 사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설거지하는 걸 옆에서 봤습니다. 세제 거품이 가득한 물에 그릇을 넣고 수세미로 쓱싹 문지른 뒤, 그냥 건조대에 올려놓더라구요. 제가 "왜 헹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가족은 오히려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습니다. "이걸 왜 닦아?"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게 제 첫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습관의 뿌리는 영국에 있었고, 그 시작점은 수도꼭지 구조에 있었습니다. 영국의 오래된 주택에는 냉수와 온수 수도꼭지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왼쪽을 틀면 손이 데일 만큼 뜨거운 물만 나오고, 오른쪽을 틀면 얼음처럼 차가운 물만 나옵니다. 미지근한 물을 쓰려면 싱크대에 물을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 구조가 생긴 이유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영국의 온수 공급 방식은 다락방 물 탱크에 물을 받아 보일러로 데우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탱크의 위생 상태였습니다. 뚜껑이 완전히 밀폐되지 않아 먼지와 녹이 쌓이고, 심지어 죽은 쥐나 비둘기가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깨끗한 냉수와 오염 가능성이 있는 온수가 수도꼭지 안에서 절대 섞이지 못하도록 두 개로 분리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원칙은 1999년 정식 법률로 굳어졌고, 지금도 오래된 영국 주택의 대부분은 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흐르는 미지근한 물에 접시를 헹군다는 선택지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겁니다. 헹구지 않는 게 게으른 습관이 아니라, 헹굴 수 없는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방식이었습니다.
석회수와 에너지 요금이 만든 생존 방정식
그렇다면 싱크대에 깨끗한 물을 다시 받아서 한 번 더 헹구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간단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경수(硬水) 문제입니다. 경수란 칼슘이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 성분이 다량 함유된 물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석회 성분이 잔뜩 녹아 있는 물입니다.
런던이 위치한 영국 남부 지역의 땅 아래에는 수천만 년 전에 형성된 석회암(Chalk) 지층이 깔려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이 석회암 층을 통과하면서 칼슘 성분을 잔뜩 흡수하게 됩니다. 런던 수돗물의 경도(水硬度)는 물 1리터당 약 293mg으로, 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높은 수치입니다(출처: Thames Water). 경도란 물에 녹아 있는 미네랄 농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높을수록 석회 침착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홈스테이에서 생활할 때 가장 불편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석회 문제였습니다. 전기포트 바닥에 하얀 가루가 딱딱하게 달라붙고, 유리컵에 물을 담았다 버리면 하얀 얼룩이 남습니다. 변기에도 누렇게 석회 성분이 쌓여서 잘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냄비 바닥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물로 접시를 헹궜다가는 세제는 씻겨나가지만 대신 하얀 석회 얼룩이 남습니다. 영국인들은 그래서 눈에 보이는 돌가루 얼룩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제 잔류물을 선택한 겁니다.
여기에 에너지 요금 문제가 더해집니다. 영국은 원래도 유럽 평균을 웃도는 에너지 비용을 유지해 왔습니다. 2021년까지만 해도 영국 평균 가구 에너지 요금은 연간 약 1,038파운드(우리 돈으로 약 190만 원) 수준이었는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그 해 10월 영국 정부가 설정한 에너지 요금 상한선은 불과 1년 반 만에 세 배 가까이 치솟아 연간 약 600만 원, 한 달에 50만 원을 웃도는 수준이 됐습니다(출처: Ofgem(영국 에너지 규제기관)).
이런 상황에서 흐르는 온수로 접시를 헹구는 행위는 사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손실입니다. 싱크대에 온수 한 바가지를 받아 모든 식기를 처리하는 방식은 가스도 물도 최소한으로 쓰는, 이 나라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거기에 최근 수도 요금도 사용한 만큼 내는 종량제 방식이 본격 도입되면서, 물을 흘려보내는 행위 자체가 실시간 요금 손실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 런던 수돗물 경도 약 293mg/L — 유럽 최상위권 석회 농도
- 2022년 에너지 요금 상한선, 1년 반 만에 약 3배 폭등
- 종량제 수도 요금 도입으로 물 낭비가 직접적 금전 손실로 연결
- 영국·호주·뉴질랜드·아일랜드 등 영국 영향권 국가에서 동일 문화 확산
세제 안전성과 달라지는 세대
제가 홈스테이 가족에게 "화학제품을 매일 먹는 거 아니냐"고 따졌을 때, 그들은 "평생 이렇게 해왔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엔 황당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럽에는 시중에 판매되는 모든 화학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규정(EU CLP Regulation)이 있습니다. EU CLP란 화학물질의 분류·표시·포장에 관한 유럽연합 규정으로, 인체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제품은 반드시 이 기준을 통과해야만 판매할 수 있습니다. 영국도 EU 탈퇴 이후 동일한 수준의 규제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사람이 일상적으로 접촉했을 때 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상적으로'라는 단어입니다. 접시에 남은 극미량의 잔류물을 수십 년간 섭취하는 상황까지 고려해서 안전 기준을 잡았다는 뜻입니다.
영국 시장을 장악한 세제 브랜드들은 이 점을 철저히 활용했습니다. 독성이 있는 계면활성제(Surfactant) 성분을 빼고 식물성 계면활성제를 사용했습니다. 계면활성제란 물과 기름을 섞이게 하는 성분으로, 세제의 핵심 세정 성분입니다. 여기에 비타민 E와 알로에 성분까지 추가해 피부 자극을 최소화했습니다. 광고에서도 헹구는 장면을 아예 없애고, 거품 묻은 접시를 건조대에 자연스럽게 올려놓는 장면을 내보냈습니다. 헹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식처럼 보여주는 전략이었습니다. 농축 세정력에 집중해 적은 물로 모든 식기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맥락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틱톡에 영국의 설거지 장면이 퍼지면서 영국의 젊은 세대가 먼저 반응했습니다. "솔직히 나도 엄마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는 몰래 헹궜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복합형 수도꼭지가 달린 새 아파트로 이사해도 수돗물의 석회 농도는 그대로라, 헹구면 여전히 하얀 얼룩이 남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이 세대가 찾은 탈출구는 식기세척기입니다. 식기세척기는 고온의 물로 세척하고, 린스제가 석회 얼룩까지 막아줍니다. 영국 35세 미만 가구에서는 열 집 중 일곱 집 가까이 식기세척기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터키의 경우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석회 성분이 높은 물을 장기간 섭취하면 담석증(Cholelithiasis) 발생률이 높아집니다. 담석증이란 담낭이나 담관 안에 돌처럼 굳은 덩어리가 생기는 질환으로, 경수 지역에서 유독 발생 빈도가 높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석회수 문제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장기적인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특정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국 설거지처럼 세제를 헹구지 않으면 진짜 건강에 괜찮은가요?
A. 영국 보건당국과 EU CLP 규정에 따르면, 시중에 판매되는 주방 세제는 접시에 극미량의 잔류물이 남는 상황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접시 표면에 남는 세제막이 건조되어 섭취되는 양은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없는 허용치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다만 소화기관이 민감한 분에게는 드물게 가벼운 불편함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도 있으므로, 본인의 상황에 맞게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Q. 영국 수도꼭지가 왜 두 개로 나뉘어져 있나요?
A. 19세기 영국에서 온수는 다락방 탱크에 저장해 보일러로 데우는 방식으로 공급됐는데, 이 탱크가 제대로 밀폐되지 않아 오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깨끗한 냉수와 오염 가능성이 있는 온수가 수도꼭지 안에서 섞이지 않도록 두 개로 분리하는 법을 만들었고, 이 원칙이 1999년 법률로 굳어졌습니다. 오래된 주택일수록 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영국 수돗물 석회 성분이 높으면 어떻게 해결하나요?
A. 일반 가정에서는 연수기(Water Softener)를 설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연수기란 이온 교환 방식으로 물 속의 칼슘·마그네슘 이온을 제거해 석회 침착을 줄여주는 장치입니다. 전기포트나 커피머신에는 석회 제거 필터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방식을 많이 씁니다. 최근 젊은 세대는 식기세척기의 린스제를 활용해 석회 얼룩 문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Q. 한국 수돗물은 왜 석회 문제가 없나요?
A. 한국은 국토 대부분이 화강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화강암은 석회암처럼 물에 칼슘 성분을 쉽게 녹여내지 않기 때문에 수돗물 경도가 낮고 석회 침착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가 해외에서 생활하다 귀국했을 때 우리나라 수돗물의 깨끗함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한국 수돗물 수질은 상위권에 속합니다.
결론
제가 처음 영국식 설거지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단순히 "찝찝하다"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맥락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나서야, 이것이 단순한 위생 불감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분리형 수도꼭지 구조, 경수(硬水) 문제, 살인적인 에너지 요금, 기업의 제품 설계까지 다섯 가지 이상의 요인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입니다.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경제와 환경이 남긴 흔적입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 지대 덕분에 석회수 걱정 없이 수돗물을 쓸 수 있고, 에너지 구조나 배관 문제도 상대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해외에서 직접 생활해보면 이 차이를 피부로 느낍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실질적인 생활 편의의 차이입니다. 영국 생활이나 석회수 대처법에 관심이 있다면, 연수기 설치나 식기세척기 활용 방식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현실적인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